본문 바로가기

Casual Talk

Ep 2 - 비 (여행 못가서 여행 다시가는 느낌으로 적어보는 일본 여행기)

사진은 본문에서 서술하는 홋카이도가 아니지만, 2016년에 일본 교토 여행 중 비왔을때 찍었던 사진

여행에 가장 큰 변수를 하나 꼽으라면, 날씨를 꼽을 수 있겠다. 특히나 비가 오기라도 한다면 모든 일정이 꼬이기 시작하는데, 결국 선택지는 강행 돌파를 하던가 아니면 다른 옵션을 선택하던가 둘중에 하나가 된다.

하루종일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우산을 챙겨오지 못했던 나는 비를 맞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비가 거세지자 적당히 구조물 속으로 들어가서 비를 피했다. 성수기도 아니고 날씨도 좋지 않았던 탓에 사람이 붐비지는 않았다. 투명한 건물 안에서 비가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나에게 미치지 못하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본다. 빗방울이 유리에 부서지며 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를 낸다. 비가 조금 그치면 나가야지 싶으면서도 좀처럼 비는 그치지 않는다.

비를 피하기 가장 좋은 건물, 비를 느끼기도 가장 좋은 건물

시간을 두고 기다려 보았지만, 창을 계속 두드리던 빗방울의 승리다. 나는 비를 맞이하러 밖으로 나섰다.

-

여전히 비가 내리는 오후, 오타루에 도착한 나는 여객센터에서 우산을 빌려주는 코너를 발견했다. 여기서는 무료로 우산을 대여해준다고 한다. 별도의 절차 없이도 우산을 구해 시내로 나갈 수 있었는데, 참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에 무슨 일이 있어도 우산을 반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양각색의 오르골이 있는 오르골 가게, 다양한 디자인이 노래별로 있다

오전에 이미 한바탕 비를 맞았던 관계로, 이번엔 행선지를 실내로 선택해봤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오르골 가게였는데, 이런저런 오르골을 구경하고 들어보는 것 만으로도 시간이 금세 훌쩍 지났다. 익숙한 애니메이션 곡들이 오르골화 되어서 전시되어 있는데, 오르골 특유의 심금을 울리는 아기자기한 소리를 매우 좋아하기에 하나하나 돌려가며 시간 가는줄 모르고 구경했다. 물론, 돈이 없어서 하나도 사지는 못했다. 돈좀 있을때 왔었다면 지갑에 출혈이 상당했을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들었던 오르골 소리


비가 조금은 그친 것 같아서 본격적으로 오타루의 자명한 풍경을 찾아 나섰다. 오타루는 운하 근처에 위치한 소도시인데, 운화 옆에 위치한 수많은 옛 창고들이(지금은 레스토랑으로 개조된 곳이 많다) 어우러진 풍경이 유명하다. 겨울 경치가 더 유명하지만 그건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고, 일단는 이곳의 야경을 사진으로 담기 위해 저녁까지 기다렸다. 적당히 쉴만한 곳을 찾지 못해 강가에 앉아 점심에 마트에서 도시락으로 싸온 오징어 구이와 삼각김밥을 꺼내 먹었다. 조금 식기는 했지만 여행의 맛을 느낄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오타루의 저녁. 저녁까지 기다린게 후회되지 않는 야경이었다.

시간이 늦어지자 그날의 일정을 마치고 역으로 향했다, 순간 아차 싶었는데, 비가 그치고 나서 화장실에 우산을 두고 왔다는 것을 눈치챘다. 부랴부랴 다시 우산을 두고 온 화장실까지 가보았지만 이미 영업이 끝나 화장실도 문을 닫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듯한 찜찜함과 함께 미안함이 들었지만, 부디 그 우산이 누군가에게 잘 쓰이기를 바라며 어쩔수 없이 역으로 돌아갔다. 3년 전 일본 여행에서는 구매한 우산을 기증하고 왔는데, 이번에는 빌린 우산을 잃어버렸다. 생각해보면 평균으로 회귀한거긴 한데,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오래오래 가시지 않았다.

-

비오는 날의 초원가

그리고 그 다음날도 비의 연속이었다. 비에이에 도착한 나는 하루종일 자전거 여행이 예정되었던 날인지라 조금은 고민을 했지만, 결국 비를 무릅쓰고 자전거를 타고 거리로 향했다. 오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길을 누비던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여행이라서 무엇이든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 난 비가 오늘 날을 딱히 싫어하지 않는데, 여행을 갔을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도 비오는 날이고,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도 비오는 날에 찍은 것들이 많다.

맑은 사진은 흔하지만, 비오는 날의 사진은 흔하지 않다. 그리고 난 흔하지 않는것에 높은 가치를 둔다. 

담배광고를 찍어서 유명해진 마일드세븐 언덕. 눈이 뒤덮인 사진은 많이 봤지만 먹구름이 뒤덮이 사진은 흔치 않다.

비 사이에서 바라본 풍경은 흔히 사진에서 보던것과 조금은 다른 풍경이었다. 눈오는 이곳의 풍경사진도 많이 봐왔고, 맑은 날의 풍경사진도 많이 봤다. 하지만 비오는 날의 사진은 그리 흔치 않다. 난 인터넷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던 이곳의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용케도 사진기가 잘 버텨줘서 다행이었다. 숙소에 돌아갔을때 센서에 습기가 차서 사진이 뿌옇게 될 때는 어떻게 되나 싶었지만, 하루 지나자 다행히도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여행이 매일매일 비만 왔다면 당연히 즐겁지 않겠지만, 예상과 달리 내린 비는 나에게 추억거리가 되었다. 사람은 아이러니한 동물이라서, 좋은 일들 사이에 힘들었던 일 하나를 평생 추억으로 간직한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자전거로 광활한 초원가 도로를 누비던 일은 평생 다시 해보기 힘든 경험이었다. 나는 이날을 아마도 그 여행중 어느 순간보다도 오래 기억하지 않을까?

흐린 하루였지만, 그 어느때보다 또렷하게 기억에 남을 하루.


숙소에 도착해 축축해진 옷을 벗어던지고 숙소에서 제공해준 유카타로 갈아입었다. 비교적 이른 시간이었지만 하루종일 누적된 비의 무게가 슬슬 나의 눈꺼풀도 끌어내리고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싸구려 숙소 다다미 바닥에 이불을 깔고 바로 누웠다.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5성급 호텔도 부럽지 않았다. 눈을 감고 다음날은 날이 맑기를 기대하며 잠이 들었다. 비오는 날도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끝끝내 맑은 날이 오리라는 기대 덕분에 비오는 날도 아름다워 보인다는 것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