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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ual Talk

아니요, 당신이 틀렸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당해 졸업여행 참여자 수가 너무 많아서 인원수에 제한을 둬야 하는데, 마땅히 방법이 없으니 졸업시험 모의고사 성적을 기준으로 인원을 추린다고 했다. 성적으로 인원을 추린다는 발상이 조금은 어이가 없었지만, 어쨌든 내 성적이 중간쯤은 간다고 생각했기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모의고사 성적이 나왔는데, 난 반에서 거꾸로 2등을 했다. 물론 졸업여행도 그렇게 나가리가 되었다.

난 평소에 부지런한 학생은 아니였다. 숙제도 자주 안해가고 그래서 선생님들이 썩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때를 나름 되짚어보면 그냥 숙제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할까? 어짜피 숙제를 안해도 절반 이상은 간다는 우쭐한 마음에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수업 중 졸거나 무단 결석은 한 적이 없었다. 그건 그래도 지켜야 할 기본이라고 생각했기에.

"너 맨날 수업에서 졸고 그러니까 성적이 이렇게 나오지. 네 탓이니 반성하렴."

속으로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수업에서 졸았던 적은 단 한번도 없는데, 받아든 성적표 앞에서 나는 한없이 약자가 되었다. 모의고사 성적 따위가 뭐라고 내가 하지 않았던 잘못까지 지적할 수 있는 권리를 쥐어준 건지는 몰랐지만, 난 그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한마디라도 더 하는 순간 난 처참하게 짓지 않은 또 다른 죄를 뒤집어쓸 것만 같았기에.

그렇게 난 모의고사가 아닌 본시험에서 올 1등급을 받아냈고, 선생님의 "거봐 수업에 집중하고 숙제 잘 하니까 되잖아" 라는 말에, "아니요, 당신이 틀렸어요"라고 속으로 조용히 외쳤다. 물론 그 뒤에 난 숙제도 열심히 하고 수업은 여전히 열심히 들었지만, 그건 내가 더 나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내가 하지도 않은 잘못을 정죄할 수 없도록,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보호색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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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에 가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내가 당시 큐브라는 취미에 매진하게 된 이유는 어떤 친구의 영향이 큰데, 그 친구가 늘상 나를 비웃으며 하던 말 때문이었다. 그녀석은 나에게 "반년을 줘도 넌 나를 이길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거기까지는 그냥 넘어가줄만 했는데, 거기에 들이댄 이유가 내 마음속 불을 지폈다. "너처럼 어설프게 노력해서는 절대 안된다니까."

도발에 못이긴 나는 반년이 아닌 2달을 기한으로 내세웠고, 결국 2달만에 어찌어찌 실력을 역전했다. 그 친구와는 그 뒤로 다른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멀어져서 더이상 친구가 아니게 되었지만, 내가 어설프게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증해줬다는 면에서는 나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내가 어설프게 노력하다 만다는 그 평가 만큼은 틀렸다고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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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를 들어가기 전에, 어떤 어르신의 조언을 들었다. 지금이라도 조금 더 현실적인 목표로 바꾸는게 어떻냐고. 현실적으로 이룰수 있는 목표를 둬야지 이건 네 실력으로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아니라고. 날고 기는 애들이 미친듯이 노력해야 이룰 수 있는 목표라고. 애초에 너정도의 사람이 고작 남들보다 조금 더 노력하는 걸로는 택도 없다고.

그 뒤로 오기가 생겨서 더 악착같이 노력했다. 이미 노력하고 있었지만 더 많이 노력했다.

그리고 난 내가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다. 이 오기는 내가 날고 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평가에 대해 억울해서 생긴 게 아니였다. 내 노력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에 대한 반항이였다.

그분에게 그 평가가 틀렸다고 정말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분은 내가 대학을 입학한 시점에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속으로라도, 당신이 틀렸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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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렇게 된 지는 모르겠지만, 난 노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그것에 반항이라도 하듯이, 난 그것을 반증하기 위한 수도 없는 억지를 부려왔다.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것 쯤을 내가 몰랐을까? 하지만 그 실패가 내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낙인찍히는 것 만큼은 죽어도 싫었던 것 같기에 자신을 갉아먹으면서까지 노력해온 이력이 많다.

그래서 그동안 나로써는 말도 안되는 성과를, 과분하다 못해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면서 많은 것들을 얻게 되었다. 어디가서 노력이 부족했다는 말만큼은 듣기 싫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많이 노력했던 게 아니였을까.

하지만 세상에는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도 많다.

기적과도 같은 노력의 스토리를 너무 많이 겪어와서 그런지, 난 안되는 일이라면 무조건 노력하고 본다. 언젠가는 포기를 종용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면서, 나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날만을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은 가끔,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를 느낀다. 노력하지 않는게 정답일 때도 있다는 것을,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상황은 나빠질 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때도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아니요, 당신이 틀렸습니다" 라는 말은,
가끔씩 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더이상 스스로의 노력을 탓하지 않해도 된다고.
조금은 쉬어가도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