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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ual Talk

Ep 1 - 자유 (여행 못가서 여행 다시가는 느낌으로 적어보는 일본 여행기)

공항에서 내려 삿포로로 향하는 급행열차를 탔다. 딱히 시간에 쫓기는건 아니지만 한시간이라도 빨리 숙소에 도착해서 수많은 짐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지도상으로는 역에서 꽤 가까워보이는 숙소를 잡은것 같은데, 짐이 무거워서 그런지 상당히 오래 걸은 것 같았다. 하긴 싼곳이 가까울 리가 없지.

사진 잘 나오는 날씨


9월의 삿포로 기온은 한국으로 치면 전형적인 가을날씨다. 9월이면 아직은 좀 더운 날씨를 상상하기 쉬운데, 홋카이도의 9월은 매우 쾌적하다. 기온은 약 20도가량으로 거리를 누비기 아주 적합한 시원한 날씨였다. 난 백팩 하나와 바퀴가 말썽인 배낭형 캐리어를 힙겹게 끌고 숙소로 향했다. 길을 잃을수도 있기에 가끔씩 지도를 보며 방향을 수정해준다. 조금 힘들어지자 잠깐 멈춰서 사진 몇장을 담아본다. 다시 출발하려고 하는데 캐리어 바퀴가 또 한번 턱에 걸려서 캐리어가 뒤집어진다. 캐리어를 제자리로 뒤집고 다시 내 갈 길을 간다. 그 무엇도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막아설 수 없다.

이윽고 숙소에 도착했다. 앞으로 4일간 지낼 이곳에서 나를 위해 전속된 공간은 고작 침대 한개. 침대 위에 대충 짐들을 정리해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어짜피 숙소가 조촐할수록 밖에 나가서 좋은 시간을 보낼 명분이 늘어나는 법, 갇힌 공간은 갓 전역해 자유를 갈망하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카메라 가방 하나 들고 숙소 밖으로 뛰쳐나온 순간, 나는 지난 2년간 그토록 구하던 참된 자유함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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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 하면 라면인데, 도착하자마자 첫끼를 라면으로 먹었다. 마침 삿포로역 근처에서 음식 축제가 열렸는데, 덕분에 여행온 느낌을 물씬 풍기면서 첫 식사를 할 수가 있었다. 

라면은 몇끼를 먹어도 맛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삿포로 하면 빼놓을 수 없는게 또 맥주다. 사실 삿포로 맥주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맥주는 꼭 원산지에서 먹어보라는 말 때문에 굳이 이 곳을 방문해보게 되었다.

삿포로 맥주 박물관. 건물이 상당히 유럽풍이다.


삿포로 맥주 박물관이라는 곳인데, 사실 박물관이라고 하기엔 대단한게 전시된 것은 아니고, 그냥 일본 맥주 양조산업이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한 간략과 설명과 함께 각종 맥주를 시음해볼수 있는 코너가 있다.


온 김에 시도는 해봐야겠으니, 공짜는 아니고 그냥 적당한 돈을 내서 이렇게 3잔짜리 샘플러를 받았다. 크게 대단한 맛은 아니였지만, 그래도 이런 경험을 한번쯤을 해보고 싶었기에 나쁘지 않았던 선택이였던 것 같다. 

박물관에서의 일정을 마치고는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가는 길에 삿포로 시내를 여유롭게 한바퀴 돌면서 거리의 느낌을 한껏 느껴보았다. 삿포로 TV 타워가 보이는 중앙 공원이 뭔가 분위기가 좋아서 잠깐 앉아있기로 했다.


"공원에서의 스케이트보딩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거의 1분간격으로 똑같은 목소리의 똑같은 방송이 공원 내에 울려퍼진다. 하지만 그 방송에 시위라도 하듯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다. 그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넘어져도 원래 위치로 돌아가서 같은 동작을 다시 연습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조금 더 용감하게 살아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공원에 있다 자리를 뜨고 또 다른 거리에 도착했는데, 누군가가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버스킹 치고는 고작 앰프 하나와 마이크 하나인 조촐한 구성이라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무언가에 홀린듯 거리 옆 난간에 걸터앉았다. 나는 오늘 저녁 무엇에게도 쫒기지 않는다. 다른 일정에 구애받지 않고, 잠깐 여유를 두고 누군가의 노래를 들어도 될 자유가 있다. 잔잔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2년만에 맛보는 자유가 드디어 실감이 나는 순간이였다.



하루를 마치고 나를 위해 준비된 작은 침대로 돌아와, 내일은 또 무슨 경험이 나를 기다릴지 기대에 부풀어 눈을 감았다. 내일을 위해 많은 계획을 세웠지만 사실 어떻게 흘러가도 상관 없을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저 내가 상황에 따라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선택하면 그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