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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ual Talk

Ep 5 - 짧은 인연1 (여행 못가서 여행 다시가는 느낌으로 적어보는 일본 여행기)

시부야의 저녁. 이곳은 저녁이 되어도 활기가 넘친다.

도시의 매력은 저녁이다. 어둠 속의 반짝임, 꺼지기를 거부하는 불빛, 그리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그 많은 움직이는 사람들 중, 오늘 마주칠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기대감이 그 매력을 배로 더한다.

하코다테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도쿄에 도착했다. 나에게 도쿄는 친숙하면서도 낯설은 곳이다. 영화나 애니에서 얼핏 본것 같지만, 정작 직접 찾아간 적은 없었다. 대표적으로 각종 매체에서 수없이 많이 보았던 시부야의 사거리가 그러하다. 셀수 없을만큼 많은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동시에 건너는 시부야의 정체성과도 같은 장면은, 실제로 보아야 더 웅장하다. 이 수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를 보고 있자면, 옷깃만 스켜도 인연이라는 말이 새삼 더 와닿는것 같았다.

시부야의 유명한 사거리. 뭔가 익숙한 기시감이 들지만 실제로는 처음 와보는 곳.

사실 도쿄에서는 크게 정해둔 일정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도시라는게 사실 볼만한게 생각보다 뻔해서 그냥 그날그날 끌리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그래도 필수 방문 코스는 몇군데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그 유명한 1:1 비율 건담을 볼 수 있는 오다이바였고, 그 다음은 도쿄의 야경을 높은곳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는 도쿄도청 빌딩 전망대이다. 애니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일본여행 사진 하면 빼놓을수 없는게 건담 사진이었기에 일단 오다이바를 첫번째 행선지로 정했다.

1:1 비율 유니콘 건담. 건물과 대조해서 보면 실로 웅장한 크기이다.
자유의 여신상. 미국에 있는 진짜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디테일을 보여준다.

오다이바는 건담 말고도 둘러볼만한 곳이 상당히 많았는데, 오리지널은 아니지만 자유의 여신상도 있고 이런저런 신기한 구조물들이 참 많았다. 원래라면 쇼핑할게 참 많은 곳이기도 한데 돈이 없어서 그냥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오다이바는 코미켓 등등 대형 전시회/판매회 등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한데, 그 당시 시즌이 아니여서 그런 광경을 볼수 없는건 조금 아쉬웠다. 그리고 하루 데이트 코스로 이만한 곳이 없겠다고도 생각했지만, 여행지에서 그럴 일도 없고 애초에 여행도 혼자 나온 시점에서 그런 발견은 큰 의미가 없다.

나는 오다이바에서 느긋하게 오후를 보내고 야경을 찾으러 신주쿠로 향했다.

도쿄도청 전망대에서 바라본 도쿄의 야경

도쿄도청 전망대는 신주쿠 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특이점이라면 도쿄에 존재하는 여러 전망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무료다. 하지만 무료 전망대 치고는 그리 붐비지도 않고 전망도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인데, 만약 도쿄 도심에서 괜찮은 전망대를 찾고 있다면 아마 주저없이 이곳을 추천할 것 같다. 난 야경을 참 좋아하는데, 야경은 가만히 넋놓고 불빛들이 반짝이고 움직이는 것만 봐도 나도 모르게 몰입이 되어 시간이 훌쩍 흘러버린다. 그 야경을 사진에 담는 것은 조금의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때 야경사진 만큼 뿌듯한 사진이 또 없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저녁을 보낼 시부야로 향했다. 혼자 여행할때에 단점이 있다면, 혼자서 들어갈만한 가게를 찾기가 참 애매하다는 것이다. 너무 인기가 많고 붐비는 곳을 가면 뭔가 눈치가 보이고, 그렇다고 너무 사람이 없는 가게를 가면 현지의 분위기를 만끽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시부야 근처 여러 곳을 돌아다니던 중, 적당히 시끌시끌한 가게를 찾았다. 뭔가 외국인들이 붐비는게 아닌 현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던 이곳의 정체는 타치노미야 (立ち飲みや) 였는데, 그 뜻을 직역하자면 "서서 마시는 집" 이다. 일본 술집중에 의자가 없이 서서 마시는 곳이 있는데, 뭔가 현지의 느낌이 많이 나서 홀리듯이 이곳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케와 함께한 명태알 생계란 백반. 별거 없지만 정말 기억에 남는 메뉴였다.

종업원에게 마실만한 사케를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순한 맛과 진한 맛 등등 여러가지를 추천해줬는데 일단은 외국인이니까 순간 것이 어떠냐고 했지만 난 진한게 좋아서 샤라쿠(寫樂)라는 사케를 시켰다. 아직도 이 사케의 이름이 기억이 나는게, 이걸 시켰다고 종업원이 엄청 신기하게 쳐다본 기억이 난다. 한입 먹어볼때 내 표정을 지켜보며 어떻냐고 물어보더라. 내 취향이라고 말했더니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는데, 이게 외국인들이 보통 선호하는 맛이 아니라고 한다. 아무튼 난 졸지에 종업원들 사이에서 "입맛 특이한 한국인" 이라고 낙인이 찍혔는데, 그새 옆자리에 있던 형님이 갑자기 말을 걸어오셨다.
 
그분은 대충 나보다 3~4살정도 많은 형님이셨는데, 인생 한탄도 하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자기도 슬슬 결혼을 해야할 나이인데 인생이 쉽지 않다는 내용이였다. 나도 별로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했는데, 이분이 갑자기 취했는지 급 내 어깨를 두들기면서 내가 부럽다고 하셨다. 

"너... 진짜 대단한 거야. 혼자서 외국어도 배우고 외국까지 나갈 용기를 가진다는건. 나는 별볼일 없지만, 그래도 내가 이런 곳에서 방황하다 너를 만났으니 내 인생도 또 나름 살만한 것 아니겠어? 내가 봤을때 너는 꼭 잘 될꺼야... 내가 봤을때 너는 꼭 잘 될것 같아."

그분은 할말을 다 하시고 순간 조용해 지시더니 종업원에게 계산서를 달라고 하셨다. 아마 만취해서 원래라면 할 리가 없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에게 내뱉었던게 아닌가 싶다. 그분이 그런 말을 했다는걸 다음날 잊어버렸을 수도 있지만, 그분이 그 순간 해줬던 말은 나에게 참 오래오래, 1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내가 우연히 마주친 누구에게 한 한마디가, 그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도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날이었다. 나는 도쿄에서 보내는 다음 며칠 저녁을 꼭 이곳에서 보내기로 마음먹고, 그날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다음날은 또 어떤 인연이 나를 기다릴까, 기대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잠들게 된 저녁이었다.